레온의 낯선 공기 먼 북소리


많은 선택지에 있어서 학교 생활은 뒤로 훌쩍 밀어두고 학기내내 유럽 대륙을 누비며 여행을 다녔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음식, 새로운 이야기들. 낯선 곳이 주는 친숙함이 좋았고 사실 나는 조증에 걸린 사람마냥 그저 다 좋았다. 돈이 없으면 호스텔 아침 빵 한두개만 챙겨와서 끼니를 해결하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공원에 누워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즐거움도 매달 일주일 이상씩 여행 다니다보니 조금씩 감흥이 덜하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달은 뭔가 테마를 만들어 차세정이 다녔던 루트를 따라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가볼까, 아니면 너무나 좋았던 스페인으로 다시 가서 한달 동안 여행을 다닐까 고민했고 마지막 계획은 다른 대륙으로 가는 것이었다. 두근두근 불과 몇 개월 전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도 많았고 참 겁도 없었던 것 같다. 하핫.......

가장 유력했던 플랜은 아프리카 나미비아로 가서 하르나스 동물농장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르나스 동물 농장에서는 많은 일꾼들이 병들고 나이든 야생 동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보지 않은 땅을 밟고 좋아하는 동물들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또 새로운 경험들이 내게 줄 수많은 에너지가 기대되었다. 벗 그러나 비행기 값이 너무나 비쌌고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서는 예방접종 등등 많은 절차가 필요했다. 적어도 기본은 하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던 학교 생활도 잘 마무리하고 아직 남은 몇개의 여행도 하고 모든 걸 욕심낼 순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는 많이 비슷하고 두 국가 다 2년 전에 가보았다는 것, 그리고 여행 성수기라 사람들이 너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플랜인 스페인을 택했다. 그냥 스페인 여행만 하면 섭섭할 것 같았다. 뭔가 모험을 하고 싶었다. 내가 잘 못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고 새로운 나를 찾고 싶었고 신앙심을 되찾고 싶었다.......는 이런 숭고한 의도는 별로 없었고 그냥 걸어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의 시골 마을 구석구석 걸어보고 싶기도 했고 많은 짐 없이 단촐하게 다니고 싶기도 했고 운동도 못하고 싫어하는 내가 하루에 20km이상씩 걷는 걸 할 수 있을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밤 뛰는 연습을 했고 까미노 까페에 들어가 정보도 얻고 필요한 것들 리스트를 잘 작성해서 준비했다. 한국인들 워낙 꼼꼼하니까 참 많은 걸 준비해가던데 사실 난 좀 귀찮기도 하고 해서 정말 필요한 것들만 준비했고 그냥 운동화에 책가방을 가져가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열흘을 보내고 캐리어는 미리 산티아고에 보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가 아니라 스페인 레온이라는 도시에서 출발할 계획을 세웠다. 2주면 충분하겠지, 라는 생각에 까미노가 끝나고 발렌시아로 내려가서 안달루시아까지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땐 참 뭣도 모르고 패기도 넘쳤다^^^^^ 까미노 끝나고 여행할 생각을 하고 다 닳은 운동화 신고 책가방 메고 까미노 걸을 생각을 하다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정신없이 놀았던 바르셀로나를 뒤로 하고 캐리어도 산티아고 민박으로 휙휙 보내고 레온으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혼자 씩씩하게 잘 다니던 나였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함께 하다 홀로 떨어지니 괜히 갑자기 두렵고 외로워져 닭똥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독일에서 함께 했던 식구들은 유럽 각지에서 여행 잘 하고 있는지, 바르셀로나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은 잘 귀국했는지, 이래저래 혼자 마음이 뒤숭숭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열심히 썼던 일기들은 발렌시아에서 다 잃어버렸다 멋지다

레온은 대도시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는 대도시가 그리 많지 않은데 레온은 그 중 하나로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에서 푹 쉬다 가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름도 Leon 으로 멋있는데 심지어 사자 문양이다. 유명한 레온 대성당도 정말 멋졌고 가우디 건축물도 운 좋게 봤다 멋지다 멋져 허허
스페인 사람들은 생각보다 더 영어를 못한다. 특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유명 관광 도시들을 벗어나면 정말 영어를 못한다. 그런데 나는 기차역에 내리고 보니 순례자 숙소 위치도 안 알아왔다. 훌륭하다. 그래서 어눌한 스페인어로 지도를 물어봤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터덜터덜 역을 나왔다. 6개월 여행자 답게 눈치껏 인상 좋은 사람들만 골라서 길을 물어보며 알베르게를 찾아 헤맸다. 약간 불쌍한 표정 지으며 두리번 거리면 도와줄까? 하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다 허허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나는 지도도 없고 책자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거지였다. 거지는 겸허한 마음으로 레온을 헤매고 다니다 순례자들을 발견하고는 눈치껏 쪼르르 붙어 갔다. 사람 좋은 척 하며 방긋방긋 웃고 인사 하고 나 레온에서부터 걷는데 너희 어디 알베르게 가냐고 친한 척 해서 겨우 숙소 한 자리 남은 데를 캐치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곳 같았는데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다 한 방에서 자는 곳이었다. 이층 침대에 먼저 베드벅 약을 열심히 칙칙 뿌리고 침낭에도 칙칙 뿌리며 혼자 부산스럽게 준비하는데 어디서 한국말이 들렸다. 헐 완전 기뻐하며 달려가 쭈뼛쭈뼛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고 그때부터 이것저것 여쭤봤다. 대부분 언니들이셨고 생장부터 걷고 계시다고 하셔서 내가 지도도 없고 길도 모르니 아침에 레온 빠져나가는 길만 좀 같이 걸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물론 이때부터 만났다 헤어졌다 하며 산티아고까지 함께 했던 분들이 되었다. 헤헤
처음 뵙는 분들께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일단 알베르게를 빠져나와 레온을 좀 더 구경하고 모자도 사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 후 감자와 고추와 햄을 올리브유에 볶은 요리와 맥주로 저녁을 간단히 먹었다. 그리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는데 다들 어디론가 가고 있어서 또 눈치껏 쪼르르 따라갔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기도여서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를 주신 부모님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300km가 넘는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드렸다. 기도가 끝나고 돌아오니 이미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밑에는 프랑스인 누군가 이미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자려고 눕기 위해 좀 삐그덕대고 소음 낸다고 혼났다 힝
시끄러울까봐 알람도 못 맞추고 일단 누웠는데 일찍 깰 수 있을까 걱정이다. 저 한국인 언니들 잘 따라가야 길을 안 잃을텐데 조개보고 따라가면 된다고 하더라도 좀 걱정이다. 내일부터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고 기분이 이상했다. 하루종일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기에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금방 잠에 들었다.













덧글

  • 라운드 2013/05/25 18:16 # 삭제 답글

    레온에서 1년 정도 학교 다녓는데...

    그 추억으로 아직도 살고 있네요...ㅋㅋ

    로또 맞으면 이민 갈거 같아요...

    기억이 아닌 현실이 되는 날을 위해서...

    그간 먼지 쌓인 서반어 책을 독파 해야겠어요... ^^

    기다려라... 에스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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