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를 걷다 먼 북소리

오늘은 나폴리로 떠났어야 하지만 전날 바티칸에 심취하여
성금요일 교황님 미사를 보고 가겠다고 기어이 기차표를 날려먹었다. 
30유로 안녕...

가난(하지만 돈을 자주 날리는)한 여행자의 마인드는 6시반에도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고 아침도 꼬박꼬박 챙겨먹게 만들었다. 배가 부르니 자신감도 충만하여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숙소를 종종 걸음으로 나섰다. 떼르미니 근처에는 흑오빠들이 무리 지어 있어서 초큼 무서웠지만 날씨가 너무나 좋아 파란 하늘도, 거대한 돌덩이들도 그저 다 좋기만 하였다. 로마 하루 일정 추가가 뿌듯해져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헤죽헤죽 웃으며 낡고 오래된 돌덩이들을 밟고 그 사이를 자박자박 걸어다녔다.








대사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복 입은 중년의 아저씨들은 23세의 나보다 더 샤방샤방하여 볼록한 배가 귀엽다. 기분이 좋아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치며 웃고 인사한다. 아저씨들도 웃으며 고개를 까딱하거나 챠오, 인사한다.
그렇게 로마와 인사하며 발길이 닿는대로 걷고 또 걸었다. 나의 목적지는 판테온 근처의 한 까페였으나 시간은 많고 골목도 많았다. 여유로우니 하늘도 보고, 바람 냄새도 맡고, 스쳐지나가는 나뭇잎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인생도, 커다란 목표를 가지고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리기 보다는 
마음을 여유롭게 가지고 주위를 돌아보며 가고 싶다. 그 목표를 달성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도
가는 길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걷다가 테라스와 길이 예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자 바로 오른쪽 하단에 있는 차 속에서 뭔가 바둥바둥거렸다. 
자세히 보니 두 남녀가 고이 포개져 있다가 내가 카메라를 들자 화들짝 놀라서 차가 들썩들썩하는 바람에 
나도 같이 당황해서 너희 찍는 거 아니라고 손을 흔들흔들... 해버굿타임












내가 본 트레비 분수 중 가장 한산했던 트레비를 지나 열심히 걷고 또 걸어 까페에 도착! 
커피 맛이 그리 좋다고 명성이 자자하여 찾아왔습니다요

건장한 유러피안들 속을 헤집고 들어가 카페라떼 주문 완료! 
북적이는 바 구석에 자리잡고 오도카니 서서 홀짝홀짝 마시려 했으나... 
하 너무 맛있어서 후루룩 마셔버렸다. 이렇게 진하고 부드러운 커피가 너무나 그리웠다 
몇 모금 안 마셨는데 끝나버린 잔을 하염없이 들여만 보다 종업원이 냉큼 치워버렸다 힝 

한잔 더! 외치기에 나는 30유로는 그냥 날리면서 2유로에는 벌벌 떠는 가난한 여행자^^^^^
까페 그레코에 가기 위해 스페인 광장으로 나섰다.













스페인 광장 도착!
숙소에서 가져온 바나나와 옆 침대에서 주무시던 분이 가엾이 여겨 빌려준 책자를 꺼냈다. 
계단에 앉아 오드리햅번은 젤라또를 곱디 곱게 먹었건만 나는 바나나를 흡입하였다. 
호오 진짜 달디 달다. 


일본인 신랑신부는 이곳에서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는 것만도 너무나 어려운데 평생을 함께할 짝을 만나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다들 결혼이라는 걸 하겠다고 결혼정보업체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기도 하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노력을 하는데 가정을 잘 꾸려서 살아가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조금씩이나마 나이 먹으면서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아빠에게 박수

이제는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대리만족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내가 결혼이라는 걸 할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은 가끔 고개를 들기도 한다.










내려오니 사람이 무지하게 많다 스페인 광장 안뇽



로마의 군밤장수 아저씨















스페인 계단에서 뜬금없이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총총 내려와 까페그레코 잠입 완료
특히 독일에서 온 예술가나 작가들이 많이 찾았다고 해서 카페 테데스코, 독일인의 까페라고 오랫동안 불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nodaknodak 하기도 하고 각자의 세계관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겠지
가령... 오늘은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를 완성했엉 너는?

















잘생긴 청년이 연미복 곱게 차려입고 커피를 만들어주었다. 카푸치노 주문했는데 진촤 맛있다 엉엉 
개인적으로 타짜도르 보다는 그레코에 한 표를 던져주고 싶다 카푸치노 사랑합니다 하아
부드러운 우유거품하며 진한 에스프레소가 조화를 이루어 나는 또 거의 원샷........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준 청년이 고마워서 몰래 사진을 찍었다





미안요.......






이렇게 놀다보니 때는 벌써 오후 3시. 미사 보러 바티칸까지 걸어가면 시간이 조금 남겠지만 
그래도 늘 쫓기며 빠듯하게 해서 허덕였던 지난날(내 비행기......)을 돌이켜보면 그때 출발했어야 했다. 

나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는 항상 욕심 내서 가장 중요한 걸 때로 그르치는 것.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 외의 것은 이후에 욕심을 내도 될 일이다. 











근데 나는 결국 보르게세 공원을 갔지. 그리고 공원은 정말 좋았지.

침 흘리며 바라보다가 사진도 찍다가 바티칸으로 긴 여정을 떠나기 직전에 
오늘 나의 험난한 길을 함께 해준 마지막 바나나를 해치웠다. 두 개 가져오길 잘했지 훗  




바나나 먹으며 찍은 사진들을 검열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아저씨가 다가와 사진 찍어줄까? 한다.
웃으며 아뇨 괜찮아요, 하고는 카메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까 스페인 광장 찾아가던 중 이상한 애가 자꾸 놀자고 졸라대는 통에 경계심이 삐쭉삐쭉 서있던 터라 나이 좀 있어 뵈는 아저씨가 말을 거는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2년 전 여행을 통해 느낀게 있었다면 늘 조심하되 지나치게 경계 상태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다 보면 여행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이 반감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일단 아저씨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기에 미소띤 얼굴로 바나나 먹으면서 넹 저 한국에서 왔어요 우물우물 하면서도 가방과 카메라는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저씨 이름은 안토니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인지 내 말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며 대화하려는게 느껴졌다. 
로마에 동양인 쌔고 쌨는데 왜 이렇게 신기해하는건가 싶은데 너처럼 혼자 다니는 동양 여자애 별로 못봤어 한다. 그래서 내가 떼르미니 역 앞에 앉아 있으면 하루에도 몇명씩 보게 될거에요 라고 얘기하자 막 웃는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 떨어져 앉아 조심조심 이야기를 건넨다. 
얘기하다 보니 은근 재미있어서 더 대화하고 싶은데 시간이 촉박해져서 
아쉬워하는 아저씨를 두고 그만 일어나야 했다. 안토니오 챠오!








이탈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녀의 진한 스킨십도 나쁘지 않았지만
서로 등에 기대어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이 커플이 제일 예뻤다 :)



공원에서 바티칸까지 걸어서 오십분은 걸릴거라 했지만 내 단련된 파워워킹으로는 삼십분이면 충분했다. 핫챠






30분만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와 수다 떠느라 혹은 내가 보르게세 공원에 기어이 가느라
줄은 어마어마하게 길었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교황님 미사 보려면 미리 신청해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뒤에서 서서라도 미사 보고 싶었는데
한 시간 넘게 줄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앞에 열몇명을 앞두고 잘렸다...... 힝 






교황님 알현은 어제 했으니 그걸로 만족하고 할 수 없이 사람들이랑 밖에서 미사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다 함께 미사 보는 건 처음이야.........

추운데 덜덜 떨면서 2시간을 서서 미사를 봤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느낌, 기운, 분위기 같은 것들.
세상 어떤 것도 명확하게 정확하게 설명될 수 없다면 나는 내가 느끼는 걸 믿고자 한다.
좋은 글, 좋은 음악에서 내가 얻는 기운들. 인상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지난날과 인품.

추기경으로 추측 되는 분들의 노래로 미사는 진행되었고 힘겹게 움직이시는 교황님의 몸짓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비록 베드로 성당 안에서 미사드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에 다시 왔고, 부활을 축하드린다고. 이번 부활절 휴가를 잘 보내고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드렸다. 미사가 끝날 때쯤 옆에 계시던 할아버지와 Happy Easter, 인사하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온종일 걸어다니며 점심을 못 먹어 허기진데다 추위에 떨다오니 배고파서 저녁 식사 폭풍 흡입 후 
조금 쉬다 방 사람들과 함께 야경 보러 시내로 나갔다. 의욕만 가득찼던 우리는 좀 걸어나온 후에야 
아무도 지도 없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지도 없이 걸어가본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온종일 헤매던 길을 수줍게 안내했다. 





나 따위는 초점도 맞춰지지 않는 센스
좋은 카메라다


트레비 분수로 돌아가 관광객 돋게 로마에게 또 다시 오겠노라, 
그 사랑스러운 돌덩이들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더 느끼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동전을 던졌다. 
분수 앞에서는 바티칸 투어 같이 했던 사람들도 만나 살갑게 인사하고 판테온도 다시 만나 반갑게 눈인사했다.












이날 밤 달이 참 고왔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골목의 한 까페에 자리잡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호기롭게 비라모레띠도 마셔줬다. 
맥주 진짜 오랜만에 마신건데 두세모금 마셨더니 온데간데 없었다... 아오 아쉬웡

더 늦어지기 전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마 별거 아니네 라며 신나게 걸어오던 길에 차 앞좌석 유리창을 다 깨고 차를 털고 있는 흑오빠를 보았다
우리는 너무 놀래서 숨도 못쉬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소리없이 파워워킹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떼르미니 역 근처에 와서야 다시 재잘재잘 떠들며 떼르미니 앞 흑오빠들이 점잖은 거였다며 
다시 농담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8일간 이탈리아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무서운 광경이었다.


가득가득한 하루가 끝나고 
내일이면 드디어 남부로 떠난다.




덧글

  • Mr 스노우 2012/05/01 20:55 # 답글

    로마 거리가 참 예쁘게 잘 찍혔네요 ^^ 꼭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트레비 분수는 제가 갔을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사진 찍기도 힘들었는데, 조금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가 좋네요 ㅋ

    저때가 성금요일이었군요. 4월에 이탈리아가 많이 추웠나보네요 ㅎㅎ 저는 저때 학교 성당 미사에 참석했었는데ㅋㅋㅋ 교황청 미사라니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셨네요 ^^
  • 2012/05/22 04:49 #

    트레비 정말 사람 많죠 저 시간 때만 없고 나중엔 또 바글바글 했어요
    4월 이탈리아 정말 추웠어요 ㅠ_ㅠ 다들 이번 4월 유럽날씨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구요
    독일도 하루에도 몇번씩 추웠다 더웠다 비왔다 그쳤다 그러다가 5월로 접어드니 좀 낫네요

    교황청 미사 참석해서 정말 좋았습니다 :) 이탈리아 다니면서 성당 있으면 꼭 가서
    감사하다고 기도 드렸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주일 미사 맨날 빼먹다가....ㅎㅎㅎ
    나오니까 또 괜히 인사드리고 싶고 그렇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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